난독증, 그리고 굳이 답을 하지 않는 이유는. by 라키난


 난독증은 사전적으로는 글을 읽고 쓰는 데 어려움이 있는 장애를 말한다. 영어로는 dyslexia, lexia(speech)가 안 좋다(dys)는 뜻이다. 똑같이 글을 어려워하더라도 원인으로는 다양한 차원의 다양한 문제가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읽기가 복잡하고 어려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글을 읽기 위해서는 기호를 판별하여 지각하고, 각각을 기억하고, 그걸 조합해서 추상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 그래서 어느 단계에서 문제가 생기는지에 따라 어려움을 겪는 양상이 다르게 나타난다. 시지각, 청지각, 추상적 사고 등등. 글자를 하나하나 판별할 수는 있는데 합쳐서 읽어내지는 못 한다든가, 문자로 쓰인 단어를 의미와 연관짓지를 못해서 무의미한 기호로만 파악한다든가 등등. 후천적 난독증도 있을 수 있다. 당연하지만 시각에 문제가 있거나 다른 종류의 장애 때문에 영향을 받는 것이라면 난독증이라고 하지 않는다. 난독증은 지적 능력과 상관이 없다.

 난독증이면 철자법 말고도 보통 수 지각이나 악보 읽기에도 영향이 있다. 이러한 난독증 증상은 특히 학령기 이후에 문제시된다. 원인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분명 지적 능력에는 별 문제가 없는 학생인데 공부를 못하니까 "노력이 부족해서" 혹은 "집중을 안 해서" 안 되는 거라고 치부하기 쉽기 때문이다. 당사자에게는 굉장한 고통이 될 수 있다.  고등학교 때 "나는 난독증이 조금 있다"고 밝힌 동창이 있었는데. 가벼운 정도라서 학교는 그냥 다니고 있지만 글 읽는 게 조금 힘들다는 말이었다. 당시에는 아 실제로 난독증을 겪는 사람이 있구나 정도의 생각을 했다. 존재한다는 걸 아는 것과 내 주변에 있다는 걸 아는 건 다르니까. 내가 기억하기로 그 애는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자기 좋아하는 거 찾아서 열중할 줄 알되 남에게 부담 주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더 별 문제를 못 느꼈다. 난독증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과 다르다. 후자는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는지와 관련이 있다.

 일상적으로 쓰는 난독증이라는 말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경우를 말한다. 글에 쓰여있지 않은 의미를 읽어내서 딴 소리를 하는 모습을 두고도 난독증이라고들 부른다. 글을 제대로 읽기가 귀찮아서. 제목만 보고 훌쩍 비약해버려서, 보긴 봤는데 초점이 뭔지 몰라서. 이유는 많다. 안 되어서 안 하는 게 아니니까 진짜 난독증과 달리 양해를 구할 구석도 없다. 능력이 안 되는 건 이해해야 할 영역이지만 안이함과 불성실을 들고 오는 사람은 일고의 가치도 없이 기각이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면 천재라고 하지만, 하나를 가르쳤는데 열 가지 화를 내면, 저기, 상담이 필요합니다.

 언어 사용이란 복잡하고 어려운 행위가 맞고, 하물며 생각의 차이에 기인하는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기는 외국어의 장벽을 뛰어넘기보다 어렵다. 부호화encoding와 해독decoding 과정에 오해가 없을 거라고, 말하는 대로 알아들을 거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건 인간이 합리적인 선택을 할 거라는 경제학의 기본 전제만큼이나 이상적이다. 이상적인, 비현실적인 전제. 하지만 완벽하지 않다고 사용하지 못할 건 없고, 실제로 언어는 생각을 나누는 수단으로 그럭저럭 기능한다. 그러니 세상에 '난독증' 반응이 존재한다는 데 굳이 실망할 필요는 없고, '난독증'에 화내기를 참을 필요도 없다. 내가 지금 화를 내는 중이냐 하면, 그게 아닌 건 아니다.

 그게 아닌 건 아니라는 것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자. 이 포스팅을 두고 난독증도 아니면서 난독증 증세를 보이는 '난독증'에게 짜증을 내기 위해 쓴 것이라고 단정해서 말하기는 힘들다. 그건 법원에서 담배회사에 승소 판결을 내렸다고 법원이 담배와 폐암이 무관하다고 했다고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담배가 폐암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자료는 많지만, 누군가의 폐암이 온전히 담배 때문이라고 증명된 적은 없을 뿐이다. 물론 폐암과 담배가 완전히 무관하다고 증명된 적도 없다. 그러니까 법원이든 이 글이든 꼭 그런 게 아닌 건 아니다. 덧붙여 난독증 유병률은 5%-15%라고 하니, 당신은 약 90%(플러스마이너스 5%)의 확률로 진단을 받을 정도의 난독증은 아니다. 읽으려고 하면 읽을 수 있고, 생각하려고 하면 생각할 수 있다. 그럼 이제 섣불리 말을 꺼내기 전에 한번 생각을 해보자. 유노와람쎙.

 나도 내가 못 쓰는 건 아는데, 어휴, 야.


파커51과 '헤세 취향' by 라키난


 "30년 전 내 펜을 처음 만났을 때 그 펜은 이미 낡은 것이었다. 잉크통은 파란색이었지만, 별 비위를 맞출 생각이 없이 음침한 얼굴을 하고 있어 대부분의 조명에서는 검게 보였다. 은색이었다가 대포 같은 암회색으로 바뀌어 버린 뚜껑에는 세로로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는 금들이 가 있었는데, 끝에 달린 불투명한 물미를 나는 귀중한 보석이라고 상상했다. 끼움쇠는 금이었으며, 화살 모양으로 생겼다. 잉크를 채우려면 잉크통의 마지막 2, 3센티미터를 돌려서 열어, 펜촉을 잉크에 담근 다음 투명한 플라스틱 흡입 막대를 눌러야 했다. 그 전에 쓰던 펜의 흐물흐물한 잉크 주머니는 누를 때마다 듣기 역겨운 소리를 내곤 했는데, 그에 비하면 감각적으로 많이 발전한 셈이었다.

 내 만년필은 5학년 때 남자친구 제프리 데이비슨이 준 것이었는데, 이 주근깨가 많은 붉은 머리 소년은 철자 시험과 핸드볼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그 이후 오랜 세월에 걸쳐 내 마음을 빼앗아간 그 모든 똑똑한 운동선수의 원형 ― 내 남편에서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 이었던 셈이다. 제프리가 그 만년필을 계부에게서 훔쳤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그 만년필은 제프리의 사랑과 신이 준 권리에 의해 내 것이 되었다. 이 만년필의 유래를 보나 그 부속물을 보나 세상에 나보다 그것을 아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대학에 갈 때까지 나는 시를 쓸 때만 그 만년필을 썼다. 산문은 그 신성을 모독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글쟁이 초년병 시절에는 초고를 반드시 그 만년필로 썼다. 세 바퀴 맴을 돌기 전에는 잠자리에 들지 못하는 개처럼, 나는 검은 잉크영의 뚜껑을 열고 숯과 송진의 최면성 향기를 들이마신 뒤, 펜촉을 담그고 흡입 막대에 잉크를 채웠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뮤즈들은 변덕스럽다. 그래서 많은 작가들이 하염없이 허공만 바라보다가 완전한 무기력을 피하기 위해 창조의 책임을 어떤 부적에 전가했다. 행운을 준다는 주문이나, 낙인이 찍힌 종이 조각 같은 것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그 부적은 글을 쓰는 도구인 경우가 많다. 내가 글을 잘 쓰고 있나? 내 펜에게 감사하라. 내가 글을 못 쓰고 있나? 나를 탓하지 말고, 내 펜을 탓하라. 이런 치환을 통해 무시무시한 상상을 우리에 가둘 수 있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생산적이지 못했던 시기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가늘고 연약한 펜촉이 달린 펜으로 쓰고 있는 중이에요." 다시 비슷한 시기를 맞이했을 때는 이렇게 썼다. "결함이 있는 펜으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괴테는 전문가에게서 우아한 필법을 배웠음에도, 그의 위대한 작품들을 필경사에게 구슬했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 글을 쓰는 일에 거리를 두게 되자 글을 쓰는 제의를 통제하고 싶은 욕구는 오히려 강해졌다. 그는 깃촉펜을 너무 길거나 너무 짧게 깎지 못하도록 했다. 또 깃털은 없애도록 했다. 새 잉크로 쓴 페이지는 모래로 말리는 것이 아니라 난로 앞에서 말리도록 했다. 그리고 그의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일을 막기 위해 이 모든 일을 할 때는 소리를 내지 않도록 했다.

 키플링은 연필로는 소설을 쓰지 못했다. 반드시 잉크가 있어야 했는데, 검은색이면 더 좋았다("나의 수호신은 모든 '암청색'을 싫어한다"). 인도 라호르에서 <소박한 이야기>를 쓸 때 그가 가장 아끼던 펜은 "늘씬한 팔각면 마노 펜꽂이에 웨이벌리 펜촉을 꽂은 것"이었다. 어느 날 이 펜이 부러지는 바람에 딥펜, 파운틴펜, 펌프펜 등을 잇따라 써 보았지만, 키플링은 이런 펜들을 "비인격적인 고용인들"이라고 부르면서 평생 죽은 웨이벌리를 애도했다.

 나도 키플링의 기분을 알 것 같다. 펜을 잃는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10년 전, 내 펜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나는 샘 많은 연인처럼 그 펜을 집 밖으로는 한 번도 내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펜이 푸르다(purdah, 장막 또는 베일이라는 뜻으로 인도에서 부녀자를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는 제도)에 저항하여 책상의 갈라진 틈으로 굴러 들어갔다고 믿었다. 나는 책상을 쪼개서 확인해 보고 싶은 유혹을 수도 없이 느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거기서 내 펜이 나오지 않으면 결국 영원히 사라졌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워 그 유혹을 물리치고 말았다. 한동안은 전에 써 놓은 글을 들고 중고 펜을 파는 가게를 미친듯이 돌아다니며 애처로운 목소리로 "이게 내가 원하는 글자 두께인데요" 하고 말한 적도 있다. 죽은 애인 사진을 들고 다니면서 "이것과 똑같은 것을 하나 더 찾아 주세요" 하고 말하는 꼴이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내 펜이 대략 1945년쯤에 제작된 파커 51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나는 제작 연도만이 아니라 색깔에서도 전에 쓰던 것과 똑같은 펜을 찾아냈다. 그러나 이 벼락 출세자는 나와 함께 집에 온 뒤에 까탈스럽게도 종이를 긁어대더니 나중에는 잉크까지 튀겨댔다. 결국 많은 돈을 주고 여러 번 수리를 했음에도 그의 전임자가 전혀 힘들이지 않고 달성했던 중용에는 이르지 못했다. 슬프게도 그 펜은 내 전 애인의 환생이 아니라, 하찮은 유령에 불과했다. 물론 나는 계속 글을 썼으나, 그 후로는 첫 단어, 첫 문장, 첫 문단을 불러내는 일이 마법이라기보다는 일처럼 느껴졌다."


- 앤 패디먼, [서재 결혼시키기] 127-130pp.



 이건 두런두런 늘어놓는 넋두리다.

 평생을 두고 읽어라, 읽을 때마다 달라진다. 흔히 고전 명작은 일찌감치 읽어두고 두고두고 읽으라는 말을 한다. 내가 접한 말에서 든 예시는 어렴풋한 기억에 따르면 어째선지 [데미안]이었다. (헤세를 두고 말하자면 나는 [수레바퀴 아래서]를 제일 싫어하고 [유리알 유희]를 성장소설의 모범례로 여기며 사적으로는 좋아하는 장르소설 목록으로 꼽는다. 더 사적으로는 주인공 크네히트를 이상형이라고 말한다. [황야의 이리]는 좋아하지는 않지만 두근거렸던 목록에 들어간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나 [지와 사랑]은 기억이 희미한 걸 보면 10대 초반에 읽었거나 아직 읽지 않았다. [환상소설집]과 [환상단편집]은 한번 잃었다가 다시 구한 책이다. 에세이인 [정원 일의 즐거움]은 너무 구도자 같은 분위기가 풍겨서 이후로 헤세는 내 안의 문학 지도에서 톨스토이와 같은 쪽으로(별로다)  약간 옮겨졌다.)

 [데미안]은 말하기 어렵다. 이 '평생을 두고 읽을 고전 명작'의 대표격에 대한 내 기억은 딱 셋이다. 주인공 싱클레어가 사랑에 빠지는 장면, "새는 껍질을 깨고 날아오른다", 그리고 고등학교 도서실 800번대 서가 구석에 꽂혀있던 [젊은 싱클레어의 슬픔]이다. 마지막은 어떻게 도서실로 흘러들어왔는지 알 수 없는 오래되고 낡은 해적판 소설이었다. 내용은 당연히 [데미안]이었는데 노골적으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편승하려는 제목으로 시대에 따른 인지도의 차이를 추론해보게끔 하는 책이라 인상적이었다. 내가 학교를 다녔던 1990-2000년대에 [데미안]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보다 먼저 불려나오는 저명한 작품으로 다뤄졌기 때문이다. "새는 껍질을 깨고 날아오른다"로 요약할 수 있는 아프락사스 이야기는 너무 대놓고 비유적이라 조금 유치하고, 너무 유명해서 조금 더 유치한 이미지가 있지만 그래도 수긍하게 되는 말이다. 수많은 사람이 이 구절만을 따다가 자기 나름으로 재창작했는데, 나는 N.EX.T의 곡 <Distruction of the Shell> 역시 제목을 여기서 따왔으리라 확신한다. 싱클레어가 데미안의 어머니에게 반하는 장면, 즉 나중에 데미안과 영혼이 묶이게 되는 장면에는 피아노와 성당과 햇살이 있었던 것 같다. 금발의 아름다운 그녀는 상냥하고 친절하고 고상하며 데미안의 어머니답게 쉬이 속내를 그리고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 어머니와 꼭 닮은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네가 좋아할 줄 알았다면서 그녀를(그는 그녀를 어머니라는 개인적인 관계로만 대하지 않는다) 칭찬하며 바람직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인다. 시간이 흘러 어린 싱클레어가 젊은 싱클레어가 되어 전쟁에 참전했을 때, 전쟁통에서 기사회생으로 만난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어머니 대신 그에게 행운의 키스를 전한다. 새 이야기도 되풀이된다. 새가 이전에 속했던 알의 껍질을 깨고 새로운 세계로 날아오르는 우화에는 정말로 온갖 의미를 담을 수 있는데 그 중 내가 한번이라도 글로 정리한 것은 동성애 코드와 여성에 대한 기피의 중간쯤 되는 음모론 하나다. 그리고 그거야 음모론일 뿐이다. 작품 전체에 흐르는 것은 그렇게 비틀어서라도 파헤쳐보고 싶은, 접근을 어렵게 하는 고고한 고상함이다. 흠모와 경애의 대상이 친구의 어머니이든 동성이든 그런 세속적인 사항은 작품의 비밀스러움이 풍기는 고상함 속에서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녹아버린다. 데미안 없이는 싱클레어는 학교에서는 유약하고 청년으로는 그저그런 병사 A다. 데미안이 두른 신비스러움, 데미안이 풀어놓는 초월적인 이야기, 그를 통한 신비 체험 때문에 [데미안]은 [수레바퀴 아래서]처럼 미숙한 젊은이의 미완성인 경지로 끝나는 방황과는 차원이 다른, 완성된 경지에서 새로운 경지로 떠나는 성장소설이 되었다.

 [데미안]이 90년대에 그토록 많이 호명되었던 이유의 반은 작품을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테고, 나머지 반을 넘겨짚어본다면 작품을 가득 채운 상징 때문일 것이다. 헤세는 고상한 취향이다. 헤세 자신이 고상한 취향이었고, 지금 와서 헤세를 좋아하는 문학 독자들에게도 그런 말을 붙여줄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얌전하고 학구적이며 고상하고 시와 천재와 아름다움을 사랑하며, 열등감이나 악의 대신 향학열과 성장에 대한 신뢰를 드러낸다. 심지어 말년의 파격적인 일탈이었던, 헤세의 작품 중 매우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축에 들어가는 [황야의 이리]마저도 이런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체 어느 무법자가 속어 하나 쓰지를 않는단 말인가.

 이에 나는 "헤세 취향"이라는 범주를 만들었다. 여기에 들어가는 사람으로는 일기를 쓰던 전혜린이나 소싯적 김윤아 등을 열거할 수 있다. (헤세를 좋아한다는 여자가 있으면 주의할 필요가 있다. 헤세를 좋아한다는 남자는 보지 못해서 모르겠다.) 부끄럽게도 나는 아직도 헤세 취향에 속한다. 내가 앤 패디먼을 좋아하는 이유를 깨닫고서는 이를 시인하게 되었다. 이게 부끄러운 이유는 앤 패디먼이 갖는 한계와 일맥상통한다. 둘 다 계급적이다. 헤세의 [유리알 유희]의 배경이 되는 카스탈리엔은 영재만이 들어갈 수 있는 교육만을 위한 특별자치주다. 주인공인 크네히트는 '겸손'이라는 이름 뜻답게 오만함이 없는 인물이지만 그것은 학문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더 큰 성취를 이루는 데 쓰이는 소양이다. 영재만이 들어가는 카스탈리엔이 주 배경이기에 작중의 모든 이야기는 영재가 아닌 이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 헤세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학문을 좋아한다'는 명제를 배신한 적이 없다([황야의 이리]만 제외하고). 앤 패디먼은 '유복한 엘리트 집안에서 태어나 진보적 교육을 받은 부르주아 딸내미'가 맞고, 그녀는 풍부한 교양과 취향의 고급스러움과 유려한 글쓰기로 이를 중요하지 않은 부분으로 만들어 버린다. [서재 결혼시키기]는 미국 의회 도서관에서 내는 잡지 <시빌라이제이션>의 칼럼이었다. 그녀는 이후엔 파이 베타 카파 클럽에서 내는 <아메리칸 스칼러>에서 편집자로 일했다. 여성의 지위라는 민감한 주제를 다루는 <그/그녀의 문제>에서, 앤 패디먼은 교양 있는, 그러니까 차별보다 인정에 익숙한 사람답게 젠체하며 여성 독자로서의 입장만 약간 밝힐 뿐이다.

 헤세와 패디먼 두 작가는 그들이 속한 계급에서 벗어날, 혹은 벗어나는 글을 쓸 생각이 없다. 자신이 다룰 문제가 아니라고 느끼는지도 모른다. 똑같이 엘리트 출신이지만 알콜중독을 고백하면서 그녀에 비해 하위 계급이라 할 수 있는 '알콜중독자 집단'과 비교하며 끊임없이 자기를 평가하고 객관화하는 수필을 쓰는 캐롤라인 냅과는 대비되는 면이다. 앤 패디먼은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외부의 이름들을 끌어들이는데, 이 취향, 그리고 이를 전시하는 모습은 그 태생적 한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고상하다. 한 달에 700만원씩을 쇼핑에 쓰며 블로그에 리뷰를 올리는 우아한 파워블로거 마나님들과도 닮았다. 그들이 펼치는 세계는 언제나 행복하지만은 않은 현실 차원의 세계일지라도 우아하고 환상적이다. 객관화를 반복해서 책을 오래 읽을 수 없도록 만드는 캐롤라인 냅은 우아함과 환상을 제공하지 못한다. 내가 [드링킹]은 일독조차 끝내지 못했어도 앤 패디먼의 책은 집어들 때마다 빠져드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비록 나는 앤 패디먼이 침대에서 하겐다즈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 파인트 한 통을 숟가락으로 퍼먹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녀가 이를 표현하는 방식 때문에 내게 이 모습은 풍부한 교양이 느껴지는 유쾌하고 사랑할 만한 문장으로 남아있다.

 고상함의 한계를 지적하는 말은 이미 들었다. 계속해서 취향을 이야기하는 것의 부질없음도 마찬가지다. 한시적 도피로서의 성격만 갖는 문학은 말하자면 알코올이랄까, 열량은 매우 높지만 영양가는 하나도 없는 것 같달까. 그러니 직업과 관련이 없는데도 지나치게 소설을 많이 읽는 사람은 주의하는 게 좋다. 소설은 본질적으로 비현실에 속하기 때문이며, 소설에 탐닉하다가는 현실 앞에 행동과 성찰로 대응하는 대신 망상으로 빠지는 데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현실로 돌아오지 않는 독서란 자기 계급에 대한 인식이 없고 자연스레 책임감도 없는 엘리트만큼 무용하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다시 어쩔 수 없이 헤세로, 그리고 [유리알 유희]로 돌아가는데. 그것은 이 책에서 그려지는 성장소설의 전개가 내게 한때 이상적인 성장 과정이었고, 아직도 대체할 경로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리알 유희는 학문과 예술의 집약체이며 그 자체로 높은 가치가 있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실용적인 쓸모라고는 전혀 없는 유희에 불과하기도 하다. 크네히트는 음악과 수학과 시와 유리알 유희를 통해 비현실적이고 비실용적인 것의 가치를 본다. 그것은 카스탈리엔의 존재 의의이기도 한데, 카스탈리엔이야말로 인류가 문화와 교양을 경시하다 벌어진 문화대전쟁이라는 참사를 다시 겪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보존소이자 발전소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크네히트는 외부에 나가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을 지닌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사에게 역사학과 정치학을 배운 적이 있기에 카스탈리엔이 주변국들의 위태로운 정치적 균형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것이 품은 가치처럼 영원하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성마르고 오만하며 연구만을 아는 카스탈리엔 인 기질과는 다르게 예산, 인맥, 줄다리기 등에 대한 현실적 감각을 유지한다. 머리를 들어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다리를 들어 땅 위를 걷는 균형잡힌 전인격적 인간상이랄까. 후반부의 제전에서는 그는 유리알 유희 명인으로서 이 축제를 '일반인'에게도 공개하는데, 유희를 전혀 모르는 수상이 왔다가 그 가치를 깨닫는 장면이 있다. 유리알처럼 아름답고, 깨어지기 쉽고, 금전적 가치는 없으나, 하지만 지금 현재 현실 이상의 경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유리알 유희가 상징하는 모든 문화와 예술, 철학은 카스탈리엔이 상징하는 교육과 함께 인류가 발전하기 위해서 양측의 사람이 모두 지키고 보존해야 할 대상이 된다. 먹고 사는 현실 이외의 축이 있고,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은 삶을 더 풍요롭고 나은 것으로 만든다고 믿기로 했다. 지나치게 고전적이고 단순하고 동화적인 믿음인데 대체할 가치관을 찾지 못했다. 나는 앤 패디먼이 모든 이에게 완벽한 작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그녀를 계속 좋아하며, 읽을 때마다 더 좋아할 수밖에 없어서 그냥 이 취향을 인정하고 그녀의 취향을 따르기로 했다. 나한테는 저항할 수 없이 매혹적이니까. 책이 세 권밖에 없다는 점만 빼면.

 봇DB를 차근차근 추가하고 있는데, 잡을 때마다 책을 반복해서 읽고 있다. 덕분에 고전에 대해 "읽을 때마다 달라진다"는 말도 경험적으로 수긍할 수 있게 되었다. 위의 장면, 만년필에 대한 묘사를 이토록 한 줄 한 줄 실감나게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처음 읽었을 때는 반쯤은 그냥 지나가버린 문단이었다. 지금은 '까탈스럽게도 종이를 긁어대더니 나중에는 잉크를 튀겨댔다'는 게 어떤 경험인지 안다. 그녀가 자신의 만년필에 부여했던 신성함, 펜을 잃어버렸을 때 깊이 새겨진 상실감이 무엇인지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 게다가 파커 51이 내게도 로맨틱한 이름이 되었다. <영원한 잉크> 전체가 그들만의 취향 이야기에서 공감할 수 있는 에세이가 된 셈이다. 카탈로그에서 "톱자국"이라는 말을 발견하고 영감을 얻어 19행 2운체 시를 쓰고 있다고 적은 저자의 모습도 십분 이해한다. 나도 만년필 장면을 다시 발견하고 다시 적다가 생뚱맞은 헤세를 불러와서 미괄식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똑똑한 에버노트가 교양을 중심으로 캐럴라인 냅과 앤 패디먼과 <퀴즈 쇼>를 엮어 메모한 것을 관련 노트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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